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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연표 확실한지 확인해주세요 제가 수행평가 하느라 지피티 돌리고 수정하고 해서 만들은 연표인데 틀린건

한국사 연표 확실한지 확인해주세요 제가 수행평가 하느라 지피티 돌리고 수정하고 해서 만들은 연표인데 틀린건

제가 수행평가 하느라 지피티 돌리고 수정하고 해서 만들은 연표인데 틀린건 없는지 확인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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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참조 하세요

한국근대사- 해방

고종즉위(1863년)

1863년 제26대 임금으로 즉위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흥선군 대원군으로 섭정시작

대원군 1차 집권(1864년 1월)

고종등극이후 집권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장악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

1866년 3월 (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

병인양요 (1866년)

1866년 10월26일 병인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보복원정을 옵니다. 이것인 병인양요입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1868년)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오페르트 도굴 사건(Oppert盜掘事件) 이라고도 함.

신미양요 (1871년) 1871년 6월 1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투

1866년6월10일 에 제너럴 셔먼호 침몰사건 때문에 1871년 5월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침공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척화비(斥和碑)(1871년)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비석(碑石)이다.

특히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조선왕조 질서 유지를 위하여 외국과 수교와 통상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세웠고, 이를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을 말합니다

대원군 실각(1873년)

1873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

운요호사건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 .

강화도조약 (1876년) (조일수호조약체결)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약이며,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설치(1880년)

1880년(고종 17년)에 설치된 관청이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기구이다

조미수호조약체결 (1882년)

1882년(고종 19년) 미국과 조선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

임오군란(1882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

대원군2차집권 (1882년6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

1882년 7월 12일 청나라군대의 개입으로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馬建忠)에의해 청나라로 압송 4년간 천진 보정부에 억류

제물포 조약 (1882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임오군란에 개입한 일본은 조선에 책임을 물어 일본 측 대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와 조선의 김홍집사이에 맺어진 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1882년)

1882년(고종19) 8월 23일 조선과청나라가 맺은 두 나라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

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閔氏)정권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

조영통상조약(1883년)

고종 20년(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 사이에 체결한 통상 조약

조선 독일수호통상협정(1883년)

1883년 조독 수호 통상 조약은 조선 말기 독일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통상조약

조선 러시아 통상협정(1884년)

1884년(고종 21)에 조선과 러시아 제국간에 체결된 조약

갑신정변 (1884년)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한 정변이다.

조선 러시아 비밀조약(밀약설)(1884년) )(고종 21)

조선은 청나라 를 러시아를 통해 견제 할려는 일종의 외교책략입니다

제1차 조러밀약설, 1885.4

제2차 조러밀약 1886.7,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베베르에게 러시아의 보호 요청과 함께 군함 파견을 간청하는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는 밀약

한성조약체결(1885년)

한성조약은 1885년 1월 9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서 체결된 조약이다.

유길준의 중립론(1885년 9월)

천진조약(天津條約 )(1885년)(고종 22년) 4월 18일

갑신정변 후의 조선 문제에 관해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조약.

영국거문도 점령사건(1885년)8월12일

1885년(고종 22년) 영국이 전라남도에 있는 거문도를 불법 점거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조불 수호 통상 조약 (1886년)

(고종 23) 6월 4일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

방곡령(防穀令) 1889년(조선 고종 26)

미곡수출 금지령 조선 말기에 시행되었던 경제 정책 가운데 하나로서, 식량난 해소를 위해 식량 수출을 금지하는 명령을 말한다. 그 목적은 지방관이 그 행정 관할 구역 내에서 가뭄이나 수해, 민란이나 병란으로 인해 농작물 생산량이 줄어들어 곡식의 가격이 오르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다. 간혹 장시의 곡물 가격이 외국 상인이 사들이는 가격보다 너무 싸서 장시에 곡물이 풀리지 않을 때에 방곡령이 시행.

동학농민운동 (1894년1월)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민중항쟁

대원군 3차집권 (1894년 7월)

1894년 7월 초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에의해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제3차 집권

1894년 10월 중순(이준용추대계획)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

청일 전쟁(1894년)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

갑오개혁 (1894년7월)

조선 고종 31년(1894) 7월27일 부터 고종 33년(1896) 2월 사이에 추진되었던 개혁 운동.

신분제 법적페지(1894년)

갑오개혁당시 신분제 를 법적으로 페지 하게됨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1895년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 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

이 조약은 5개 항목으로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한발판인셈이며 이때 일본은 조어도를 강제 병합합니다

삼국 간섭(1895년4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가 일본 제국의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한 사건

을미사변 (1895년)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

을미개혁 (1895-1896년)

친일개화파로 새로 김홍집내각을 성립시키고 을미사변으로 일시 중단된 갑오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즉, 을미개혁은 1894년 7월에서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

을미의병(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등을 계기로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

단발령(斷髮令)(1895년 12월)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이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아관파천(1896년)

을미사변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피신)함으로써 이른바 아관파천이란 사건이 발생

독립협회(1896년)설립

독립협회(獨立協會)는 1896년 7월 설립된 조선의 사회정치개혁 단체

독립신문 창간 (1896년 4월 7일)

1896년 4월 7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

발간자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습니다

3년뒤인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합니다

대한제국(1897년)선포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Empire of Korea)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호

광무개혁(光武改革)(1897년)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

대원군 사망(1898년)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 사망 직후 윤 3월 26일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파주 문산으로 이장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

1966년에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다시 이장

한일 의정서(1904년1월)

한일의정서또는 조일 공수동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립을 주장하는 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1904년 1월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을 점령한 뒤 같은 해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일본이 한국을 협박하여 이지용과 하야시 곤스케 명의로 공수동맹을 전제로 6개의 조항으로 한일의정서가 만들어졌다.

러일 전쟁(1904년 2월)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반도와 한반도 근해이며,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욕망이 충돌하여 발생하였다

제1차 한일협약(1904년8월)

1904년 - 제1차한일협약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에 대한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이다. 협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 (1905년)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개시와 함께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이른바 공수동맹을 맺고 전쟁에 필요한 조선의 지원을 강요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자 일본은 조선에 대해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체결하게 된다.

간도 협약(間島協約)(1905년)

일본 제국이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도문강(圖們江, 두만강)을 한(韓)ㆍ청(淸) 사이의 국경으로 정하여 간도를 청나라 영토로 인정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일제(日帝)는 안봉선의 철도부설권 등을 청나라로부터 획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의병(1905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5~1906년 국권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무장투쟁을 말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다.

경부선 철도 개통식(1905년 5월)

화폐정리사업(1905-1906년)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일제의 주도로 대한제국 내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고 상업은행인 일본 제일은행(第一銀行: 다이이치은행)이 발행한 화폐로 대체한 것을 말한다. 화폐정리사업의 결과로 대한제국의 화폐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은 일본제국에 의해 금융지배를 받게 된다.

통감부 설치(1906년)

1906년 2월1일 일본은 본격적으로 고문정치를위해 통감부를설치

신민회(新民會)(1907년4월)

서울상동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단체로서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조직

신민회 4대강령

1.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2.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3.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4.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헤이그 특사 사건(1907년 6월 25일)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헤이그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

고종 퇴위, (1907년 7월 20일) –

헤이그 사건으로 고종 강제 퇴위

순종 즉위. 다음 해에 걸쳐 항일 의용군 1 만 4 천명은 일본군과 1774 개의 전투를 했다.

정미7조약 (한/일 신협약)(제3차한일협약)(1907년)

한일신협약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또는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광무제(光武帝)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했다.

정미의병(1907년)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1907년~1910년 사이에 일어난 구국항일의병 전쟁을 말한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과 외정권의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하게 된다. 이어 통감부는 더 나아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여 한국민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해산군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음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1907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으로, 김광제,서상돈 등이 제안하였다. 1907년 2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조선국권회복운동(1907)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동양척식회사 설립 (1908년 12월 18일)

동양척식, Oriental Development Company)은 일본 제국이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 간단히 줄여서 동척(東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졌다. 곧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다.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

기유각서(己酉覺書)(1909년)

융희 3(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기유각서의 공식 명칭은 '한국사법 및 통감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으로서, 공식 명칭 그대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게 넘겨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이다

한일합병 (1910년)(경술국치)

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말합니다 한국민은 경향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 이어 같은해 8월 일제는 제1차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

조선 토지 조사 사업(1910-1918년)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조사 사업이다

문맹퇴치운동(1910년)

1910년 경술국치이후 애국계몽운동중 일부인 일부선각자들이 사립학교를설립 조선어 강습등을 통해 읽고 쓰고 할수있는 능력을 함양하기위한 조치

대한광복회(1915)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하여 결성되었습니다. 국권회복과 공화정치체 구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엿지만 1918년 초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 주요인사가 검거 및 사형당함으로서 해체되고 됩니다. 일부 인물들은 1920년대 만주에 근거한 의열단에 가담하게됩니다.

윌슨의민족자결주의(1918년 11월)

민족 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은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결권

2.8독립선언(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이다.

3.1운동(1919)

일제의 식민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제강점 하의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민족적 항일 독립운동,

임시정부수립(1919년 4월13일)

1919년 9월 11일 일본의 침략후 수립한 한반도 강제점령을 부인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하고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지에 설립된 한국의 임시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독립신문(獨立新聞)창간(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하였던 기관지의 이름입니다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1919년 박은식, 안창호, 옥관빈 등에 의해 창간되어

1919년 8월 독립(獨立)으로 하였다가 1919년 10월 25일 독립신문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1943년페간하였습니다

같은명칭이지만 창립일자가 다르며 독립협회기관지 페간(1899년)이후인 . 1919년 창간하였습니다

물산장려운동(1920년)

일제 강점기시절, 1920년대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전개하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이다. 이 운동은 평양과 경성을 중심으로 고당 조만식이 주도하였다

부산 경찰서 폭탄투척 사건(1920년)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義烈團員) 박재혁(朴載赫)이 부산 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봉오동 전투(1920년)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와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병력:독립군 900명 일본군 1200명

피해규모: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 일본군: 전사 157명 부상 600명

청산리 전투 (1920년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독립군이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일본 제국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병력:독립군 3000명 일본군 50,000명

피해규모: 독립군전사60명 부상 90명 일본군 전사 3300명 부상 800명

훈춘 사건(1920년 11월14일)

1920년 일본 제국이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군이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북에 주둔하는 나남사단(제21사단)의 1개연대를 출동해서 훈춘에 입성해 주변의 한인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은 만주에 있는 조선인 3만여명을 학살하였다.

간도 참변(間島慘變)(1920년 12월2일)

1920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군에게 패한 일본제국군이 간도 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때 조선인 1만여 명을 학살하였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가 불태워졌다

대한독립군단결성 (1920년 12월 20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등의 패배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독립군 세력들이 러시아 연해주의 자유시로 이동하면서, 분산된 모든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부대입니다 이부대는 자유시 참변으로 완전 와해되었습니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흑하사변(黑河事變)(1921년 6월 27일)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러시아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등의 패배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독립군 세력들이 러시아 연해주의 자유시로 이동하면서, 분산된 모든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부대이다 힘을 모으기위해 . 재집결 러시아 군대에의해 완전 괴멸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

형평운동(1923년)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소작쟁의(1923년)

소작인들의 투쟁은 소작지의 불경동맹, 소작료의 불납동맹, 아사동맹 등으로 나타나다가 폭력투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 시기에는 일제 식민농업회사와 일본인 지주에 대한 쟁의가 많았다. 1926년부터 소작인조합은 자작농까지 소작농민운동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농민조합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1927년 9월 조선농민총동맹이 조선노농총동맹으로부터 분리, 창립되었다. 농민조합은 삼남지방뿐 아니라 북부지방과 동해안 일대에서도 광범위하게 결성되었다.

의열단(義烈團)(1923년)

1923년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

미쓰야 협약(三矢協約)(1925년)

1925년 6월11일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화민국 동삼성(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협약이다. 이 협약으로 만주 내 항일 독립운동이 크게 탄압되어 위축된 협정입니다 즉 만주군벌을이용 독립군이나 한인 탄압

조선혁명군 (1925년)

양세봉지휘하에 조선혁명군조직

김좌진- 청산리전투,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승리일본의 보복으로 간도참변(경신참변)으로 무장투쟁 불가

조직적인무장투쟁을위해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를 구성

조선혁명군은 중국의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 ,홍경성 전투.일본에 매수된 마적떼에의해양세봉을 살해 이계기로 조선혁명군은 쇠퇴

동척투탄사건 (東拓投彈事件)(1926년)

1926년 12월 독립운동가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나석주는 한단군관학교 (邯鄲軍官學校) 를 졸업한 무관으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톈진에 들어가서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길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었으며, 이 사건에서 그는 권총으로 자결.

6.10만세운동(1926년)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민족혁명당(1926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일동맹을 하여 만들어진 단체로 5당이 모여 결성이 되었다.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로 분류되고 있다. 조선혁명청년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일컬어 님 웨일즈가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926년 김원봉이 창당했으나 1932년 해외단체를 통합,

신간회(新幹會)(1927년)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는 단체로 회원 수가 3~4만여 명 사이에 이르렀던 대규모 단체

3부 통합운동(1927년)

만주지역의 교민자치단체이자 무장항일단체인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통합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

1929년 11월 3일부터 광주시내에서 빚어진 한일중학생간 충돌과 11월 12일 광주지역 학생 대시위운동을 거쳐, 한편으로는 호남지역 일대로 확산되고, 다른 한편으로 서울을 거쳐서 전국 가지로 확산된 항일운동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1930년)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1931년)

193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던 김구에 의해 세워진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운동 조직이다. 1932년 이봉창의 사쿠라다몬 사건과 상하이에서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1932년), 유상근, 이덕주의 다롄 폭파 사건(1932년) 등을 지도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대항했다

병참 기지화 정책(1931년)

병참 기지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

병참 기지 일제는 만주 사변 이후 대륙 침략을 계속 확대하면서 한국을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이봉창 일왕 폭탄저격사건(1932년)1월8일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원이 되었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 (櫻田門) 앞에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쇼와 부자를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미수로 적중하지 못한사건

윤봉길의사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虹口公園爆彈投擲事件) 1932년 4월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동북인민혁명군 (1933년)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직된 한• 중연합의 항일무장단체. 1933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각 유격구별로 항일적위대와 유격대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9월에 중국인 양정우(楊靖宇)를 총사령, 조선인 이홍광(李紅光)을 사장(師將)으로 하여 제1군 제1독립사가 조직된 이래 34년 3월에 제2군 독립사가 조직되었고, 이어 제3, 4군 독립사가 조직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 9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흡수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합군(1935년)(조선인민혁명군)

1935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8•1선언에 따라 만주지방의 동북인민혁명군과 그밖의 모든 반일무장대를 반일구국의 기치 아래 연합하여 만든 부대.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10월 12일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했다. 반일통일전선 인민정부수립 인민 혁명군 수립 북한군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1935년)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로 1935년 김구를 중심으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봉준, 엄항섭, 조성환 등이 함께 설립하였다.

중일전쟁 도중 충칭으로 옮겨와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7개의 단체중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을 제외한 민족운동 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만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연합하여 탄생한. 좌익계 독립운동 연합체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민족주의계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결성에 대응하여, 1937년 11월 2일에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통합하여 결성한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단체이다. 결성후에 조선청년전위동맹도 참여하였다. 이로써 중국본토에서의 독립운동단체는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하는 민족주의진영과 조선민족전위동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진영의 양대진영으로 재편

조선혁명당(1937년)

조선혁명당은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과 맞써 싸운 단체로 지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이 중심이었다. 1937년 4월에 결성되었다.

조선의용대(1938년)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 후일에 광복군과 연합 흡수.

광복군(1940년창설

1940년 9월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정규군 지청전 장군을 사령관으로하여 정식 군사활동

1946년 5월 환국하여 한국군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현대사 해방-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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